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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맛있는 교회사 이야기’ 마지막 순서는 교회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은 세계화 시대입니다. 여기에는 기독교의 세계화도 포함됩니다. 이 때 한국교회가 세계교회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한국교회는 자체 한국교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 답해야만 합니다. ‘동양’이라는 단어는 서양인들이 만들어 규정하고 설명한 것 즉 우리 밖의 사람이 규정한 것이며 우리는 그 틀 안에서 우리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거기 머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정체성을 세워나가야 합니다.기독교인의 교회사 인식은 신학교에서 시작됩니다. 신학교에 입학하면 세계교회사를 배우…
 
츠빙글리의 신학사상츠빙글리는 한 마디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종교개혁과 사회변혁을 이루려고 힘썼던 개혁가였습니다. 스위스연방체가 양분되며 카펠전쟁을 치르다가 전사하였지만 그의 신학사상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장로교로 대표되는 개혁교회를 이루었고 사회적으로는 아르투어 리히를 통해 경제윤리로 구현되었습니다.츠빙글리의 경제 윤리 아투어 리히는 취리히 대학에 봉직한 기독교경제윤리학자로 1930년대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회변혁이 필수’라고 주장한 레온하르트 라가르목사의 강연회에 참석한 것이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대학에 진학하였고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유산을 발견하였으며 취리히대…
 
취리히 개혁교회의 시작스위스 취리히의 개혁은 교회의 개혁과 함께 사회변혁이 추진된 것이 중요한 특징입니다.먼저 취리히 교회 개혁은 예배개혁으로 시작되었는데 중세교회의 미사를 말씀 중심의 예배로 바꾸고 예배 언어도 라틴어에서 토착어인 독일어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로스뮌스터 교회가 이끌어 온 라틴어학교를 정비해 선지학교를 세우고 이를 통해 성경 주석 작업과 함께 성경번역을 시작하여 1529년 신구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출판했습니다. 이때의 성경주석이 오늘까지 큰 가치를 가지고 전래되는 칼빈주석의 원조가 되었습니다.츠빙글리의 교회 개혁은 폐지된 수도원을 사회복지 기관으로 바꾸어 행정당국이 관장하게 하면서 사회변혁을 동…
 
취리히의 1차 공개신앙토론회1529년 1월 29일에 열린 공개토론회에는 시 당국자와 일반시민, 가톨릭사제, 개혁가 등 60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이 토론회에 앞서 츠빙글리는 기존 설교를 축약하여 67개 조항으로 정리했습니다. 주제는 ‘권위’에 관한 것으로 중세교회의 전통적 권위를 부정하고 새로운 권위인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만을 주장했습니다. 드디어 토론회장에서 맞붙은 중세교회대표 파브리와 츠빙글리는 권위논쟁, 공의회논쟁을 펼쳤고 그 결과 츠빙글리가 승리하여 취리히에서 중세가톨릭 교회 시대는 끝나고 새로운 국가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일련의 변화가 따르게 되었는데 먼저 예배가 라틴어 …
 
츠빙글리 신학사상의 변화취리히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주임목회자로 청빙 받은 츠빙글리는 본격적인 개혁에 나설 즈음 당시로는 불치병으로 알려진 흑사병에 걸렸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츠빙글리는 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발병 후 모든 것을 체념하고 음악을 짓는데 몰두하던 그는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그 때까지 지니고 있던 에라스무스적, 인문적 개혁 의지를 버리고 성경에 몰입하여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힌 개혁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요한복음 연구와 아우구스티누스 연구를 통해 복음의 능력과 내용을 깨우친 후 오직 예수의 화해사역에 근거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믿음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복음의 진리를 확신…
 
시대의 자식, 시대의 리더 츠빙글리당시 시대의 자식으로서 교육을 통해 두루 시대를 섭렵한 츠빙글리는 그것을 넘어서서 사회의 리더로 우뚝 서게 됩니다. 특히 고등교육을 통해 세계 시민으로 양성된 츠빙글리는 바젤에서의 교육을 통해 중세 고전을 습득하고 인쇄술을 바탕으로 한 인문학적 열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이때 츠빙글리는 나중 교회개혁운동의 동료가 될 펠리칸과 유드라는 친구를 사귀게 됩니다.글라루스 시절의 츠빙글리 인문학 석사 학위를 받은 츠빙글리는 콘스탄츠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관례대로 고향마을에서 첫 설교를 하고 인근 글라루스에서 목회하게 되었습니다. 서너 개 교회를 돌보며 성실한 사제로서 특히 젊은이들에게 큰 …
 
1. 종교개혁의 배경 스위스앞서 살펴본 루터의 종교개혁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와 그 내부의 정치역학관계에서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웃나라인 스위스는 모든 면에서 이와는 매우 다른 환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일찍부터 스위스에는 왕이 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즉 중앙집권 정부가 존재한 경험이 전무했으며 지리적으로 알프스 산맥의 험준한 지형에 기대있어 골짜기마다 작은 부락을 형성하며 존재해왔습니다. 그러다가 1291년 호수가 많은 루체른 호수를 중심으로 한 다섯 마을이 계약연방체를 결성하면서 하나의 나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 연방체에 각 지역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점차 발전되었으나 중앙집…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완결편1522년 비텐베르크로 귀환한 루터는 4년 여간 개신교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즉 칼 슈타트와 결별하고 농민전쟁을 반대하는 등 점진적이며 온건함으로 표현되는 루터 자신의 개혁 노선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에라스무스와의 논쟁1524년과 이듬해에 걸쳐 루터는 당대 대 인문학자이자 개혁지향자인 에라스무스와 논쟁을 벌입니다. 논쟁의 주제는 ‘사람’이었는데 에라스무스는 인간은 선하며 타고 난 선한 씨앗을 교육을 통해 발아시켜 고결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루터는 인간은 철저히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칭의 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이므로 인간은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고 의인인 동…
 
마틴 루터의 비텐베르크 귀환편루터 부재의 비텐베르크 상황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 숨어 지내던 10개월 동안 비텐베르크에서는 루터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논쟁과 개혁이 계속되어 점차 과격한 양상을 보였고 이에 따라 소요와 불안한 상황들이 이어졌습니다. 대표적 상황으로 먼저 루터를 추종하는 수도사들이 수도원을 이탈했고 루터의 개혁 동료인 멜란히톤은 성만찬에서 회중에게 분잔을 시행했으며 독신 수사나 사제들이 독신서원을 깨버린 것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사제들의 독신 전통은 2~3세기 남녀결합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서 비롯되어 11세기 교회가 성직자의 독신을 강조했으며 1139년 라테란공의회에서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한 이후 강하…
 
1520년 루터의 중요한 저술활동1.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보내는 글”당시 중세교회의 피라미드 구조를 비판한 루터는 이러한 구조의 타파가 성직자에 의해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평신도인 황제와 귀족 등에게 이를 호소하는 글을 씁니다. 즉 독일의 지배세력인 귀족이나 영주 등이 공의회를 주도해야 하고 평신도의 독립성과 자주성이 보장되어야 하고 평신도 내부의 계급도 사회유지를 위한 기능적 역할만 할 뿐 근본적으로 타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의 다양성을 전제로 한 역할과 기능이 있을 뿐 계급이나 계층을 이루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것이 곧 만인제사장제이며 세속적 사…
 
루터의 종교재판한국교회는 오는 2017년을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의 해로 삼아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는 루터가 면죄부 토론을 위한 95개 논제를 비텐베르그城 교회 문에 붙인 것을 종교개혁의 시발로 여긴 것입니다. 이 논제의 핵심은 “과연 교회와 사제가 죄의 사면을 위한 중재자가 될 수 있는가?”였습니다. 그러나 토론에 응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반향은 점차로 독일 전역에 확산되었습니다. 그러자 루터는 이듬해인 1518년 3월 95개 논제들을 요약해서 발표했는데 역시 그 내용은 면죄부는 면죄의 효과가 없고 단순히 건축헌금용이며 차라리 가까이 있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이 우선되어야 …
 
루터의 사상 형성 과정, 비텐베르그 시절루터의 비텐베르그 시절은 박사학위를 목표로 학문적 깊이를 추구하던 시기였습니다. 1512년 비텐베르그로 옮겨간 루터는 학문에 몰입하는 한편 교수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루터는 시편과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 강해를 편찬하는 등 성경을 통해 자신의 신학을 세워나갔습니다. 당시 성경을 이해하는 오리게네스식 방법을 넘어서서 루터는 성경의 문자를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 즉 자신에게 실존적으로 다가오는 말씀을 들음으로써 성경은 성령께서 ‘지금 내게 하시는 말씀’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성경은 기록된 시대에 사람이 이해하는 언어로 하신 말씀이며 기록자가 처한 문화와 사회…
 
16세기 종교개혁은 루터가 주창했다기보다는 루터가 하나님의 이끌림에 따라 이 일에 먼저 나섰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한마디로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모습인 사도적 교회로 돌아가 교회의 원형을 회복하자는 운동이며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새롭게 나아가자는 운동입니다. 이는 루터만이 아니라 16세기 다양하게 일어났던 종교개혁운동이 공통된 정신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후년에 맞게 되는 루터의 종교개혁500주년을 기념해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는 유럽의 종교개혁이 한국교회의 원조임을 확인하는 동시에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 질문에서 시작된 루터의 종교개혁을 재고함으로써 세…
 
후스파와 지그문트 왕의 12년전쟁체코의 벤젤왕이 사망하고 동생인 지그문제의 왕위 계승 시도에 후스파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양진영간이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이 때 후스파는 전쟁에 임하는 각오를 ‘프라하 신앙고백’으로 발표했는데 이는 후스의 개혁정신을 되살려낸 것으로써 하나님 말씀의 자유로운 선포, 차별없는 성찬, 성직자의 재산과 정치력 배제, 보헤미아 민족의식 획복 등이었습니다. 양 진영은 12년에 걸쳐 다섯 차례 전투를 치렀으나 우열을 가리지 못하다가 협상에 들어갔으나 네가지 항목중 성찬에 관한 것에만 합의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후스파는 ‘보헤미아 형제자매’의 이름으로 존속되었습니다.후스를 정점으로 한 15세기 체코의 …
 
체코의 종교개혁자 후스는 면죄부 판매 비판으로 그동안 지지를 받던 황제로부터 더 이상 지지를 받지 못하자 망명길에 나섰습니다. 남쪽으로 이동하며 이르는 마을마다 민중언어인 체코어로 설교함으로써 기존 예배와 차별화된 개혁성향을 계속 유지했습니다. 이런 활동을 통하여 후스는 세 가지 신학사상을 유산으로 남겼는데 10계명 해설과 주기도문 강해, 사도신경 강해가 그것으로 이후 매우 중요한 교육자료가 되었습니다. 후스의 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진리와 교회’였습니다. 특히 당시 중세교회가 교황을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 구조였던데 반해서 후스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이를 중심으로 모인 무리로 이루어진 교회가 참교회라고 생각했습니…
 
2015년은 한국교회로서는 기독교공식선교 130년을 맞는 해이며 종교개혁사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종교개혁자 후스의 순교 6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이 때 ‘맛있는 교회사’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종교개혁의 정신과 역사를 살피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기철목사로 대표되는 저항의 순교와 손양원목사로 대표되는 사랑의 순교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교회가 하나님과 맘몬 사이에서 본질을 잃고 위기에 직면한 이때에 교회 갱신을 위해 순교한 종교개혁자의 모습을 살피고 자성함으로써 백색순교신앙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1. 종교개혁의 역사적 배경중세는 교황과 황제 사이의 권력 다툼이 내내 지속되던 시기였습니다. 십자군 원정…
 
초대교회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스데반의 순교 등 아픔을 통해 기독교가 확산되고 로마의 극심한 박해로 오히려 교회가 성장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을 통해 서북지역 중심의 기독교는 서울과 피난지 부산으로 확산되는 등 전국으로 그 지경을 넓혀나갔으며 애통의 현장에서 회복을 꿈꾸는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면서 기독교의 중심 또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피난지 부산에서 다양한 기독교가 좁은 지역에 집중되어 새로운 공존을 모색하고 새로운 정체성 확립의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석진영의 찬송 ‘눈을 들어 하늘 보라’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전쟁 이후 한국사회는 여러 단계에 걸쳐 숱한 발전과 변화를 겪어 …
 
일제강점기는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시기로 한국교회의 신앙과 신학이 정립된 시기였으며 이 시기 교회에 대한 박해는 교회의 성장을 가져온 한편 교회의 분열을 조장하기도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전반부 한국교회는 출애굽의 하나님, 민족을 해방시키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중심을 이루었으나 후반기 들어 교회에 대한 일제의 핍박이 심해지면서 고난 받은 예수에 대한 신앙으로 변화되어 내면화되었습니다. 한편 신비주의 운동이 일면서 이단이 발흥하기도 했습니다.이 때 한국교회는 이미 평양대부흥운동과 장로교의 독노회, 총회 조직을 통해 전국적 체계를 갖춤으로써 민족운동을 내부에서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교회와…
 
구한말 한국교회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오직 예수를 구주로 삼고 살았습니다. 당시 선교가 시작되던 때 우리 나라는 국권을 잃어 임금이 강제 폐위되고 군대가 해산되는 상황이었으나 하늘나라의 임금인 예수가 선포되고 하늘 군대인 교회가 설립되는 영적 회생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기에 앞서 대부흥운동을 통해 기독교가 내용과 형식을 갖춤으로써 고난의 시기를 견디어 낼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헌신했던 선교사들 중 홀 선교사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부 선교사 중 부인인 로제타 선교사는 남편과 딸을 선교지 조선에서 잃고도 당시 가장 고통 받던 서북지역 여성 어린이 그 중…
 
경건주의운동에 영향을 받은 신앙인들은 말씀대로 믿고 그대로 살기 위해 헌신을 다짐하고 그 방편으로 선교에 뛰어 들어 미지의 세계로 향했습니다. 그 중에서 3개국 6개 교파의 선교사가 조선을 찾아왔는데 당시 ‘선교규정집’에 따르면 이들은 열정 및 헌신도가 높고, 성경 지식이 충만하며, 가르치는 능력이 탁월하고, 의료나 교육 등의 전문성을 갖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낯선 조선 땅에서 그분들은 언어와 관습 그리고 사람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 중 말콤 펜윅과 윌리엄 멕켄지 선교사는 사랑하는 선교지 조선에서 생명이 다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선교했습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헌신은 찬송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을 통해…
 
천여년 중세교회의 타락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종교개혁교회는 그러나 백여년도 되지 못해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이는 신앙고백이 지리한 교회교육으로 전락했고 설교 또한 지리한 교뢰 설교로 전락했기 때문인데 이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것이 경건주의운동입니다. 경건주의 운동은 복음서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사는 것이 신앙인의 책무라는 각성에서 출발했으며 독일에서 시작되어 영국과 미국에 영향을 끼쳤고 이는 세계복음화를 위한 선교운동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특히 영국으로 전해진 경건주의운동은 웨슬리 형제에게로 이어졌고 이들은 신대륙선교 등 열정적 선교에 헌신했는데 동생 찰스 웨슬리는 찬송을 통한 영향력 있는 전도운동에 크게 기여했…
 
종교개혁이란 14~17세기에 서유럽에서 일어난 교회 개혁운동으로 보통 16세기 개혁운동을 말합니다.1. 종교개혁과 결혼종교개혁자들은 개혁과 함께 결혼을 했는데 이는 강력한 교황권의 바탕이 되는 독신 사제의 영적 우월성 그리고 중세교회 본질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사상가요 교사이며 예언자였을 뿐 아니라 회중찬송의 선구자였습니다. 그의 찬송 가운데 ‘내 주는 강한 성이요’(통일찬송가 384장, 21세기 찬송가 585장)는 가장 널리 불리는 찬송입니다.2. 종교개혁과 신앙고백종교개혁 시기에는 여러 가지 신앙고백이 등장하는데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 ‘제2 스위스 신앙고백’, ‘웨스…
 
중세교회는 7세기 초 그레고리우스 교황으로부터 16세기까지 이어지는데 이 시기는 교황제도와 수도원 운동으로 대표됩니다. 1. 교황제도와 십자군 원정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신비주의적 삶은 강력한 교회의 영적인 힘으로 작용했고 막강한 교황권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멸망하여 다수의 왕국으로 분열되었고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분열되었으며 종교개혁으로 서방교회의 다수의 교파들로 나뉘었습니다. 또한 이슬람교의 시작으로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 간에 긴장이 고조되고 마침내 십자군 원정으로 그 갈등의 골이 깊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특히 십자군 원정 실패로 교황권이 약화되었고 흑사병의 창궐로 교회에 대한 불신이 …
 
찬송은 신앙고백의 내용과 형식을 갖추고 있고, 성도들의 삶의 모습을 포함하고 있으며, 교회의 역사를 바라보는 하나의 창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찬송을 통해 교회사를 보는 것은 효과적이면서도 합리적인 방법이 됩니다. 이제부터 시대 구분에 따라 찬송을 통해 교회사를 함께 바라봅니다.초대교회의 신앙과 신학초대교회는 주후 600여년 즉 그레고리 교황 이전까지로 보며, 다시 로마에 의한 박해의 시가인 전반300년과 기독교 공인 이후 중세까지 이어지는 후반 300년으로 구분합니다.이러한 초대교회의 주제어로는 순교와 금욕주의 그리고 이단을 꼽을 수 있습니다.초대교회에 있어서 순교란 예수를 따르기 위한 필연적 과정과 결과입니다. 최초…
 
한국 교회와 이단 문제- 이단과 신학·신앙의 확립 : 성경에서 이단은 예수의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 교회공동체를 분열하게 하는 사람들로 나타납니다. 이런 이단에 대해 ‘내가 믿는 것을 변증하는 것’이 바로 신학이 되었습니다. 즉 초대교회 때는 예수가 누구신가에 대한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에 비추어 봄으로써, 중세교회 때는 교회권위에 대한 도전이 곧 이단으로 규정되었고 종교개혁 때는 개혁자들의 신앙고백과 기록에 따라 이단이 규정되었고 근현대교회에서는 오직 성경만을 중심으로 이단이 규정되고 있습니다. 모든 시대를 통틀어 이단은 교회를 바라보는 창이 되었고 이단의 도전은 늘 교회를 개혁하고 새롭게 하는 역할을 해 왔습니…
 
한국 이단의 특징 분석- 미국이단의 특징 (5Ps, prophet, promise, plan, possibility, place) : 북미 뿐 아니라 모든 이단을 분석하는 틀은 주로 이 다섯가지에 의존합니다. 즉 단체의 설립자 또는 지도자와 교리, 그리고 그 교리의 현실화 계획가 가능성 그리고 근거지의 마련 등입니다. 이 틀에 따라 분석한 결과 고학력, 전문직종 종사자가 이단에 미혹되는 경향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의 습관과 정보 그리고 사고와 감정을 통제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외국의 경우 이단에 대처하기 위해 이단에 대한 공신력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고 무엇보다 이단 피해자을 …
 
- 북미 교파주의를 배경으로 한 이단들이 발흥 : 미국의 기독교는 서유럽 기독교가 전래되었는데 정부의 정교분리 원칙과 신앙의 자유 보장에 따라 다양한 교파주의 교회가 형성되었고 이것이 그대로 우리나라에 이전되었습니다. 미국 기독교의 2차 각성운동 당시 미국교회는 교파주의에 몰두했고 이를 틈타 이단이 참된 교회를 주장하며 발흥하였고 정통교회의 압박에 따라 서부로 이전하여 터전을 잡게 되었습니다.- 한국 기독교이단 발흥에 끼친 북미 교파주의 선교와 이단 : 구한말 미국교파주의가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안식교를 비롯한 미국 이단 또한 우리나라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하에서 만주사변을 전후로 한국 기독교에 신비주의 활…
 
기독교 이단을 대하는 바른 자세는 이단을 알고 대처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성경을 바로 알고 우리 신앙을 교회 안팎에 선언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은 초대교회로부터 찾아볼 수 있는데 초대교회의 역사는 이단과의 투쟁사라 할 수 있으며 이단과의 투쟁을 통해서 신학을 공고히 하는 계기로 삼아왔습니다.한국전쟁과 이단발흥- 한국전쟁은 본격적인 이단발흥의 시기 : 한국교회사에서 한국전쟁은 서북지역 중심의 기독교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기회가 되었으며 이와 함께 교회가 전국적으로 부흥하였고 이와 함께 이단이 피난지 부산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발흥한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 한국전쟁 당시 이단들이 집중 발…
 
강원지역 교회사, 선교지 분할 협정의 체결과 파기당초 감리교 선교지역이었던 강원지역에 장로교회가 선교를 시도하면서 총회차원에서 선교지 분할협정이 파기되자 강원지역에는 급격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즉 강원지역 선교를 놓고 감리교와 장로교가 경쟁관계에 돌입할 것입니다. 장로교의 지역교회와 노회는 강원지역 선교를 위해 선교목사 파송을 총회에 청원했고 이에 따라 총회가 검토 후 허락함에 따라 주로 서북지역출신 선교목사들이 철원, 장전, 강릉, 춘천 등지에서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다만 1942년 총회가 묵호에 전도목사로 파송한 김우일 목사만은 예외적으로 서북지역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이후 1945년 광복을 맞으면서 국토가 분단되고…
 
2. 성육신 사건들국민 계몽운동1904년 김정식 등 연동교회 교인이 된 옛 독립협회 인사들은 담임목사 게일의 집에서 국민계몽을 위한 교육협회를 창설했습니다. 이는 러일전쟁 이후 개혁의 수단이 봉쇄되자 뒷날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교과서 편찬과 교사양성, 학교건축 등의 사업이 추진되었습니다. 또한 이와 함께 담임목사 게일이 회장인 기독교청년운동에 참여하여 중추적 역할을 감당했는데 특히 구국차원의 체육운동을 매우 중시하였습니다.신식학교 설립한편 연동교회는 나중에 경신학교가 된 예수교중학교를 설립하여 식물학, 지리, 산술, 화학 등과 함께 조선역사, 한문 등을 가르치며 조선에 대한 자긍심과 자의식을 갖게 하였고 1904년부터…
 
선교 초창기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추진된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주 대상은 일반 대중과 여성, 서민 등 사회 하층민들이었습니다. 반면 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사회 상층부는 서양 문명 특히 미국의 문명을 접하고 깨우치면서 이를 우리 국가와 사회에 적용하려 했습니다. 그 방법의 하나로 스스로 기독교에 접근하고 주체적으로 수용하게 되었습니다.당시 정치 사회적 상황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에 이어 1997년 대한제국이 출범한 때였습니다. 국가의 장래를 염려하며 새로운 국가체제를 구상하던 사월남 이상재를 비롯한 고위 관료 중심의 사대부들은 독립협회를 출범시키고 부정부패의 척결, 외세 배격, 입헌정치를 …
 
20세기 중반 이후 세계에큐메니칼 운동은 WCC활동으로 대변됩니다. 따라서 세계에큐메니칼 운동사 두 번째 시간은 1948년 1차 총회부터 2013년 제10차 총회까지를 살펴봅니다.1. 1948년 암스테르담 총회주제, 질서의 하나님. 44개 국가, 146개 교단 및 교회 참여. WCC창립 결의. 동서 양진영간의 긴장 발생2. 1954년 미국 에반스톤 총회주제. 소망. 인종차별과 식민지 정책에 대한 논의 활발. 3. 1961년 인도 뉴델리 총회주제.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빛. 회원의 급격한 증가. 국제 선교협의회 합병. 교회의 사회봉사에 대한 논의. 총회 후 바티칸 공의회 소집 예고4. 1948년 스웨덴 웁살라 총회주제. …
 
세계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는 17세기로부터 시작되어 19세기에 이르러 활짝 꽃을 피웁니다. 그 후 20세기 까지 지속되다가 2차 세계대전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은 단절되었고 이후 WCC를 통해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1. 선교로부터 비롯된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17세기까지 개신교는 유럽중심의 종교였으나 항해술의 발달과 영국의 종교탄압으로 그 중심이 신대륙으로 이전하게 됩니다. 이 때 유럽에서는 항로개발과 함께 인도를 비롯하여 세계선교를 시작하였고 18세기 선교기관이 설립되었으며 세계선교지원을 위한 신앙단체가 생겨났습니다. 이때 발생한 세계선교에 대한 열정은 신대륙으로 옮아갔고 이후 19세기 말 우리나라를 비롯한…
 
5. 사회봉사활동으로 나타난 일제치하의 에큐메니칼 운동다. 한국교회역사는 주일학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만큼 역사가 깊습니다. 감리교회로부터 시작된 주일학교는 세계주일학교연합회와 활발히 교류하고 교제를 직수입하여 사용하였으며 10개 교단과 모든 선교사들이 참여하는 조선주일학교연합회을 조직하는 등 연합과 일치운동을 매우 활발히 진행하였습니다.6. 광복 후 에큐메니칼 운동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세계교회는 화해를 과제 삼아 WCC를 창설했고 한국교회는 여기 참여함으로써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었던 세계교회와의 관계 복원의 전환점으로 삼았습니다. 7. 1950년대 중. 후반 NCCK의 활동당시 NCCK회장 한경직목사는 초교파적 연합…
 
에큐메니칼 운동은 연합운동이며 상호협력과 일치운동입니다. 이 시간에는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를 시대별로 살펴봅니다.1. 선교초기 성경번역을 위한 연합활동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 역사는 선교초기 선교사들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상임성서위원회를 조직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함으로써 ‘성경은 하나’라는 아주중요한 한국교회 전통을 확립했고 이로부터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 전통이 시작되었습니다. 2. 공의회 구성을 통한 에큐메니칼 운동이후 장로교회의 경우 3개국 4개교단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이 공의회를 조직했고 이후 1905년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공동으로 공의회를 조직해 하나의 개신교를 조직하고자…
 
WCC를 둘러싸고 한국교회 안에서 60년째 이어지고 있는 논쟁과 오해에 대해 알아보고 있는데 이번 주는 세 번째 항목부터 살펴봅니다.3. WCC의 선교유예론이 논쟁은 WCC도 과연 선교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는데, 19세기 유럽과 북미의 교회들은 아프리카 등지에서 선교에 나서면서 서로 협력하였고 이 선교를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1910년 세계선교대회를 열고 1921년 국제선교협의회를 창설하였으며 1948년에 이르러 WCC를 창설하였습니다. 즉 WCC는 선교를 위해 선교현장에서 출발한 단체이므로 이런 논쟁에 이른 의혹은 불식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의혹의 출발은 1960년…
 
WCC와 한국교회2013년 WCC 제10차 부산총회가 유치된 2008년부터 총회가 끝난 지금까지 WCC를 둘러싼 한국교회의 분란과 논쟁과 매우 격렬히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논쟁이라기보다는 1950년대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단 분열의 한 단초가 되었던 WCC를 둘러싼 논쟁의 재연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WCC와 한국교회의 만남은 1948년 WCC 1차 총회에 한국장로교회 대표가 참석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4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WCC 제1차 총회에 참석한 한국장로교회대표가 귀국 보고하고 이어서 정식 회원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1954년 제2차 총회 참석을 위해 대표 파송을 결정한…
 
70년대 이후 교회 여성교회부흥과 사회발전에 기여한 여성60년대 산업화와 함께 한국교회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대도시 교회가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한편 사회적 약자와 손잡은 일부 목회자들은 작은교회를 추구하였고 또 다른 제3의 목소리는 바로 여성들로서 물량적 성장에 치우친 대형교회를 향한 일침을 가하며 모성을 기반으로 한 생명사랑운동을 전개하여 한국교회와 사회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즉 남성과 투쟁하기보다 조화를 이룸으로써 남녀 모두가 자유하는 인격체로서 동등성을 확립하고자 하였으며 여성이 여성됨에 자긍심을 가지는 여성의식을 확산하기 위해 계속교육원을 설립하고 여전도회관을 설립하여 마침내 여성안수를 실현하는 등의 성…
 
1930년대와 해방 이후 교회여성이미 살펴본 것과 같이 장로교 안에서는 함남노회에서 청원되고 가결된 여성들의 치리권 청원이 1933년과 이듬해 거푸 부결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는 여성치리권 찬반 목회자의 기독신보 기고가 논쟁으로 발전하며 끝내 찬성론자의 주장 철회가 마감되면서 교회내 여성관련 질서가 봉건주의 질서로 회귀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보수회귀 성향과 보수성은 5년후 신사참배 결의로 무너졌고 끝내 한국교회의 소멸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때 교회 여성들은 상위기관인 총회 의결을 정면 거부하거나 침묵함으로서 소수의 남은 자가 되어 신앙 양심과 신앙의 순결을 지켜 후일 교회 재건의 기틀…
 
1920년대와 30년대 한국교회여성한국교회 초창기에 복음으로 인한 변화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 중 하나는 우리나라 여성의 의식변화였습니다. 예수 안에서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라는 자긍심을 갖게 된 교회여성들은 1898년 평양 널다리골교회에서 여전도회를 조직했습니다. 여전도회는 전국 곳곳으로 조직이 파급되었고 이후 여전도회지방연합회를 거쳐 1928년 여전도회전국연합회가 장로교총회의 법적 기관으로 승인되었습니다.여전도회를 축으로 한 교회여성의 교회 밖 활동은 교회여성들이 국가 주권의식을 갖추면서 성경 속 인물들을 따라 항일운동을 위한 의식으로 발전하여 항일결사단체 결성를 결성했고 독립자금을 마련하여 임시 정부에 보내는 등의…
 
한국교회의 여성안수실현21977년 여성안수실현을 위한 여전도회전국연횝회의 활동은 보다 구체적이었습니다. 신학대학원 교과과목에 여전도회를 포함시키고, 주일학교공과에 여성에 대한 의식 고취를 위한 과목을 삽입했으며, 미 장로교회 여성지도자를 초청해 경험을 듣는 강연회를 여는 등 보다 효과적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1990년 여전도회전국연합회는 전국노회장을 초청해 협조를 요청하고 신학대교수들을 통해 여성안수의 신학적 근거를 마련하는데 주력했는데 이들은 교회 안팎에서 남녀는 수평적 관계와 파트너쉽을 가져야 하며, 교인의 다수인 여성이 당회에서 배제되는 것은 교회내 민주화에 역행할 뿐 아니라 비성격적이며 비사회적이고 주장했습니다.…
 
2000년대 교회의 평화통일 운동과 북한선교 북한체제 붕괴가 가시화되었다고 생각한 한국교회가 90년대 북한교회 재건운동에 나선 이후에도 북한 체제가 유지되지 한국교회의 북한선교 방향은 탈북자 선교를 통한 영적 성전 건축사업으로 전환되었습니다. 90년대 남한교회의 북한에 대한 시선은 낙관론과 신중론 두 가지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장 통합교단은 교류와 소통을 추구하는 획기적 북한선교 정책을 추진해 나갑니다. 그 결과로 97년 조선그리스도교연맹과 접촉하여 밀가루를 지원하였고, 관련노회 즉 평양노회 차원에서 온실공급과 환자지원 사업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이후 과거 존재했던 신학교 재건을 지원하고 평양제일교회를 건축함으로…
 
80년대 한국교회 양적성장의 시대에 모든 교회와 교인들이 물량적 성장에 몰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소수의 신앙인들은 1980년대부터 민족통일에 대해 각성하고 사회민주화와 한반도 화해와 평화통일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한국교회의 통일논의는 NCCK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1980년 한창 부풀어 오르던 민주화의 꿈이 군부 독재정권의 재등장으로 무산되어 암울했던 시기에 독일개신교연합회와 NCCK는 에큐메니칼협의회를 개최해 한반도 통일에 관한 논의를 했습니다. 그 후 1984년 10월 WCC동북아정의평화협의회를 통해 한국교회에 통일의 생기를 불어넣었고 1986년 스위스 글리온에서 제1차 남북기독자회의를 통해 처음으로 남북교회 당…
 
1960년대 우리 사회는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도시 특히 서울을 중심으로 한 물량적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이 때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는 표어에 나타난 대로 물질적 번영 추구 의식은 성장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았고 이것은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사회의 경제성장은 교회의 경제 사정 호전으로 이어지고 이는 교회의 힘으로 축적되었으며 특히 70년대 서울 강남개발과 이에 따른 교회의 급성장은 오늘날 대형교회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물질적 성장 이데올로기는 교회 안에 깊이 스며들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축복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물질적 축복에 몰입하는 기복신앙이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축복에 따른 …
 
이천년 교회 역사 속에서 한국교회는 1960년대부터 놀라운 성장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이후 삼십여 년 간 지속된 성장은 최단 기간 동안에 이룩한 매우 놀라운 것으로 일찍이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한국교회 성장의 가장 큰 배경은 사회의 산업화입니다. 즉 1960년대 산업화의 물결과 함께 도시가 확장됨에 따라 한국교회는 이를 기반으로 물량적 성장 즉 교인수와 재정의 성장을 이룩합니다. 반면 농어촌 인구와 함께 농어촌 교인이 대도시로 이주하여 도시교인으로 변모하면서 농어촌 교회는 쇠퇴하기에 이르렀습니다.당시 한국교회가 이렇게 성장 일변도가 치닫게 되면서 한국교회는 성장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게 되었으며 특…
 
1950년대는 한국전쟁이 발발로 시작하여 모든 것이 무너지고 파괴된 가운데 온 국민이 극심한 고통과 절망을 겪는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이때 교회는 주어진 과제를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더욱 악화시키는 분열을 거듭했습니다. 1952년 1차 분열로 고신교단이 분립하고 이어서 1954년 2차 장로교 총회의 분열로 기장교단이 탄생한 이후 교단분열의 여파는 각 노회와 개 교회의 내부 갈등과 분쟁으로 번져갔습니다. 그러자 분열된 장로교단을 하나로 이끌 지도자로 이원영목사가 총회장에 추대되어 1934년 신사참배결의 취소 성명을 발표하는 등 교단통합을 위해 힘썼으나 1959년 3차 분열로 합동과 통합교단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
 
한국장로교단의 특성이라면 연합과 일치 즉 에큐메니칼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907년 독노회를 세울 때 연합하고 일치하여 하나의 교단을 세운 전통은 1950년대에 이르러 10년여간에 걸쳐 세차례 분열하게 됩니다.장로교단 분열의 씨앗은 이미 1930년대 잉태된 것으로 성경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장로교신조와 결합하여 성경의 학문적 연구 논란, 창세기 저작자에 대한 논쟁, 아빙돈 주석 번역 사건, 여성 치리권 청원 문제 등을 거쳐 점차 증대되었습니다. 이런한 갈등은 1934년 총회에서 신조1조와 성경의 완전성을 지킴이 한국교회의 전통이라고 확인하고 표준성경번역 집필을 결정하면서 벅형룡대 김재준의 대립으로 표면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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