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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3]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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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의 1차 공개신앙토론회 1529년 1월 29일에 열린 공개토론회에는 시 당국자와 일반시민, 가톨릭사제, 개혁가 등 60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이 토론회에 앞서 츠빙글리는 기존 설교를 축약하여 67개 조항으로 정리했습니다. 주제는 ‘권위’에 관한 것으로 중세교회의 전통적 권위를 부정하고 새로운 권위인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만을 주장했습니다. 드디어 토론회장에서 맞붙은 중세교회대표 파브리와 츠빙글리는 권위논쟁, 공의회논쟁을 펼쳤고 그 결과 츠빙글리가 승리하여 취리히에서 중세가톨릭 교회 시대는 끝나고 새로운 국가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일련의 변화가 따르게 되었는데 먼저 예배가 라틴어 대신 토착 언어인 독일어로 진행되었고 예배당에서 성상과 성화가 철거되었으며 성직자의 금혼이 깨어져 다수의 성직자가 결혼하였습니다. 1차 공개토론회 결과로 개혁의 물살이 급류를 타면서 수도자들이 수도원을 떠나게 되자 그 잔류재산과 업무의 처리가 취리히 종교개혁의 중요한 주재가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잔류재산은 시당국에 귀속하기로 하고 환자와 나그네 돌봄 그리고 복지사업, 교육 등은 시 당국이 맡으며 교회는 신앙문제에 전담하기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져 시민사회 성숙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이에 따라 취리히의 개혁 작업은 완전히 자리를 잡아 취리히 사회는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취리히의 2차 공개신앙토론회 새롭게 개혁된 취리히에는 새로운 문제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는 개혁과정 중 교회의 성상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폭력이 발생하고 이것이 점차 집단화된 것입니다. 그러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공개토론회가 소집되었는데 1523년 10월 26일부터 사흘간 350여명의 성직자를 포함하여 전체 연방에서 일반시민 등 90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여기서 주된 의제는 성화와 미사였는데 한시적으로 성화를 허용하기로 하는 등 시의회는 중도적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두 번의 토론회를 통해 츠빙글리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으며 중세교회는 점차 소멸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즉 사순절 금식 전통은 차츰 소멸되었고 중세교회의 미사는 예배로 바뀌었으며 취리히 시는 완전히 종교개혁도시국가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 동참하지 못한 세력인 농민들은 크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농노출신인 이들은 10%의 소작료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츠빙글리는 이를 5% 내외로 조정하자는 안을 제시했으니 농민들은 완벽한 자치권과 독립권 그리고 농지 소유를 요청하며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농노에서 동등한 관계로 신분변화를 제시했으나 농민들은 농노제도의 완벽한 폐지와 교회재산을 농민들에게 분배할 것을 요구하며 결국 독자노선을 택하여 재세례파 운동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취리히 개혁 교회 1. 예배개혁 개혁된 교회는 미사를 설교와 성만찬 중심의 예배로 바꾸었습니다. 성만찬은 가급적 자주 시행할 것을 권했으나 1년에 네 차례 시행되었고 성찬기는 화려하지 않게 나무로 제작하였으며 교회 안의 성상을 철거하고 말씀 집중을 위해 악기 연주도 금지했습니다. 2. 새로운 체제 츠빙글리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교회체제를 구상했는데 이는 교회가 행정당국의 감독을 받되 경제적 독자성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교회가 토지를 소유하여 임대료와 소출로 목회자 사례를 지급하는 등 교회를 운영하도록 했습니다. 3. 새로운 목회자 양성기관 설립 츠빙글리는 교회의 라틴어학교를 정비하여 선지학교를 개교하여 중세교회 성직자들을 재교육하는 등 개혁 교회의 목회자를 양성했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새롭게 청빙된 히브리어교사 펠리칸과 츠빙글리가 성경교육 특히 원어로 성경 읽기를 중심으로 교육했는데 히브리어 주석과 라틴어 해석 그리고 토착어 설교로 이어지는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런 형식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과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 전체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원어 성경이 토착어 성경으로 번역되어 1532년 완전한 독일어 신구약 성경이 완역되어 출판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오늘날 설교의 원류를 츠빙글리의 선지자학교에서 찾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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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의 1차 공개신앙토론회 1529년 1월 29일에 열린 공개토론회에는 시 당국자와 일반시민, 가톨릭사제, 개혁가 등 60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이 토론회에 앞서 츠빙글리는 기존 설교를 축약하여 67개 조항으로 정리했습니다. 주제는 ‘권위’에 관한 것으로 중세교회의 전통적 권위를 부정하고 새로운 권위인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만을 주장했습니다. 드디어 토론회장에서 맞붙은 중세교회대표 파브리와 츠빙글리는 권위논쟁, 공의회논쟁을 펼쳤고 그 결과 츠빙글리가 승리하여 취리히에서 중세가톨릭 교회 시대는 끝나고 새로운 국가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일련의 변화가 따르게 되었는데 먼저 예배가 라틴어 대신 토착 언어인 독일어로 진행되었고 예배당에서 성상과 성화가 철거되었으며 성직자의 금혼이 깨어져 다수의 성직자가 결혼하였습니다. 1차 공개토론회 결과로 개혁의 물살이 급류를 타면서 수도자들이 수도원을 떠나게 되자 그 잔류재산과 업무의 처리가 취리히 종교개혁의 중요한 주재가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잔류재산은 시당국에 귀속하기로 하고 환자와 나그네 돌봄 그리고 복지사업, 교육 등은 시 당국이 맡으며 교회는 신앙문제에 전담하기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져 시민사회 성숙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이에 따라 취리히의 개혁 작업은 완전히 자리를 잡아 취리히 사회는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취리히의 2차 공개신앙토론회 새롭게 개혁된 취리히에는 새로운 문제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는 개혁과정 중 교회의 성상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폭력이 발생하고 이것이 점차 집단화된 것입니다. 그러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공개토론회가 소집되었는데 1523년 10월 26일부터 사흘간 350여명의 성직자를 포함하여 전체 연방에서 일반시민 등 90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여기서 주된 의제는 성화와 미사였는데 한시적으로 성화를 허용하기로 하는 등 시의회는 중도적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두 번의 토론회를 통해 츠빙글리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으며 중세교회는 점차 소멸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즉 사순절 금식 전통은 차츰 소멸되었고 중세교회의 미사는 예배로 바뀌었으며 취리히 시는 완전히 종교개혁도시국가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 동참하지 못한 세력인 농민들은 크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농노출신인 이들은 10%의 소작료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츠빙글리는 이를 5% 내외로 조정하자는 안을 제시했으니 농민들은 완벽한 자치권과 독립권 그리고 농지 소유를 요청하며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농노에서 동등한 관계로 신분변화를 제시했으나 농민들은 농노제도의 완벽한 폐지와 교회재산을 농민들에게 분배할 것을 요구하며 결국 독자노선을 택하여 재세례파 운동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취리히 개혁 교회 1. 예배개혁 개혁된 교회는 미사를 설교와 성만찬 중심의 예배로 바꾸었습니다. 성만찬은 가급적 자주 시행할 것을 권했으나 1년에 네 차례 시행되었고 성찬기는 화려하지 않게 나무로 제작하였으며 교회 안의 성상을 철거하고 말씀 집중을 위해 악기 연주도 금지했습니다. 2. 새로운 체제 츠빙글리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교회체제를 구상했는데 이는 교회가 행정당국의 감독을 받되 경제적 독자성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교회가 토지를 소유하여 임대료와 소출로 목회자 사례를 지급하는 등 교회를 운영하도록 했습니다. 3. 새로운 목회자 양성기관 설립 츠빙글리는 교회의 라틴어학교를 정비하여 선지학교를 개교하여 중세교회 성직자들을 재교육하는 등 개혁 교회의 목회자를 양성했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새롭게 청빙된 히브리어교사 펠리칸과 츠빙글리가 성경교육 특히 원어로 성경 읽기를 중심으로 교육했는데 히브리어 주석과 라틴어 해석 그리고 토착어 설교로 이어지는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런 형식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과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 전체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원어 성경이 토착어 성경으로 번역되어 1532년 완전한 독일어 신구약 성경이 완역되어 출판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오늘날 설교의 원류를 츠빙글리의 선지자학교에서 찾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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