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work

맛있는 교회사 이야기에서 제공하는 콘텐츠입니다. 에피소드, 그래픽, 팟캐스트 설명을 포함한 모든 팟캐스트 콘텐츠는 맛있는 교회사 이야기 또는 해당 팟캐스트 플랫폼 파트너가 직접 업로드하고 제공합니다. 누군가가 귀하의 허락 없이 귀하의 저작물을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경우 여기에 설명된 절차를 따르실 수 있습니다 https://ko.player.fm/legal.
Player FM -팟 캐스트 앱
Player FM 앱으로 오프라인으로 전환하세요!

[10/05] 한국 개신교 130년 - 한국 장로교단의 분열과 재결합 노력1

55:41
 
공유
 

Manage episode 120034173 series 96409
맛있는 교회사 이야기에서 제공하는 콘텐츠입니다. 에피소드, 그래픽, 팟캐스트 설명을 포함한 모든 팟캐스트 콘텐츠는 맛있는 교회사 이야기 또는 해당 팟캐스트 플랫폼 파트너가 직접 업로드하고 제공합니다. 누군가가 귀하의 허락 없이 귀하의 저작물을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경우 여기에 설명된 절차를 따르실 수 있습니다 https://ko.player.fm/legal.
한국장로교단의 특성이라면 연합과 일치 즉 에큐메니칼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907년 독노회를 세울 때 연합하고 일치하여 하나의 교단을 세운 전통은 1950년대에 이르러 10년여간에 걸쳐 세차례 분열하게 됩니다. 장로교단 분열의 씨앗은 이미 1930년대 잉태된 것으로 성경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장로교신조와 결합하여 성경의 학문적 연구 논란, 창세기 저작자에 대한 논쟁, 아빙돈 주석 번역 사건, 여성 치리권 청원 문제 등을 거쳐 점차 증대되었습니다. 이런한 갈등은 1934년 총회에서 신조1조와 성경의 완전성을 지킴이 한국교회의 전통이라고 확인하고 표준성경번역 집필을 결정하면서 벅형룡대 김재준의 대립으로 표면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1938년 신사참배가 결정되고 나서 극심한 침체기를 거쳐 이후 한국교회가 사실상 소멸되는 1945년 7월을 지나 광복을 맞기까지 이런 논의와 논란은 잠복기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장로교의 1차분열은 신사참배문제의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경남노회에서 출옥성도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참회와 정화 주장은 신사참배에 참여한 다수의 교권파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들이 신학교재건을 통해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노회승인을 받아 설립한 고려신학교는 남부총회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끝내 법통파는 1952년 별도의 총노회를 구성하여 고신교단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장로교 2차 분열은 1930년대부터 시작된 성경관 대립이 신학논쟁으로 번지고 이후 잠복되었다가 1947년 조선신학교 사건으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은 김재준교수 등의 고등비평을 배울 수 없다며 총회에 진성서를 냈고 총회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김재준목사를 자유주의 신학자로 판단하고 김목사가 소속된 경기노회에 목사직의 면직을 지시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이에 반발하는 경기노회와 호남의 교회들 그리고 조선신학교가 각각 총회와 대랍하면서 결국 기독교장로회 총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1950년대 장로교의 분열을 보는 우리의 시각은 결코 단편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되며, 이는 분열만을 보며 교회의 절망을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같은 시기에 사회 재건에 앞장섰던 생명의 역사도 함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현대 한국교회사를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거울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continue reading

99 에피소드

Artwork
icon공유
 
Manage episode 120034173 series 96409
맛있는 교회사 이야기에서 제공하는 콘텐츠입니다. 에피소드, 그래픽, 팟캐스트 설명을 포함한 모든 팟캐스트 콘텐츠는 맛있는 교회사 이야기 또는 해당 팟캐스트 플랫폼 파트너가 직접 업로드하고 제공합니다. 누군가가 귀하의 허락 없이 귀하의 저작물을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경우 여기에 설명된 절차를 따르실 수 있습니다 https://ko.player.fm/legal.
한국장로교단의 특성이라면 연합과 일치 즉 에큐메니칼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907년 독노회를 세울 때 연합하고 일치하여 하나의 교단을 세운 전통은 1950년대에 이르러 10년여간에 걸쳐 세차례 분열하게 됩니다. 장로교단 분열의 씨앗은 이미 1930년대 잉태된 것으로 성경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장로교신조와 결합하여 성경의 학문적 연구 논란, 창세기 저작자에 대한 논쟁, 아빙돈 주석 번역 사건, 여성 치리권 청원 문제 등을 거쳐 점차 증대되었습니다. 이런한 갈등은 1934년 총회에서 신조1조와 성경의 완전성을 지킴이 한국교회의 전통이라고 확인하고 표준성경번역 집필을 결정하면서 벅형룡대 김재준의 대립으로 표면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1938년 신사참배가 결정되고 나서 극심한 침체기를 거쳐 이후 한국교회가 사실상 소멸되는 1945년 7월을 지나 광복을 맞기까지 이런 논의와 논란은 잠복기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장로교의 1차분열은 신사참배문제의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경남노회에서 출옥성도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참회와 정화 주장은 신사참배에 참여한 다수의 교권파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들이 신학교재건을 통해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노회승인을 받아 설립한 고려신학교는 남부총회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끝내 법통파는 1952년 별도의 총노회를 구성하여 고신교단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장로교 2차 분열은 1930년대부터 시작된 성경관 대립이 신학논쟁으로 번지고 이후 잠복되었다가 1947년 조선신학교 사건으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은 김재준교수 등의 고등비평을 배울 수 없다며 총회에 진성서를 냈고 총회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김재준목사를 자유주의 신학자로 판단하고 김목사가 소속된 경기노회에 목사직의 면직을 지시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이에 반발하는 경기노회와 호남의 교회들 그리고 조선신학교가 각각 총회와 대랍하면서 결국 기독교장로회 총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1950년대 장로교의 분열을 보는 우리의 시각은 결코 단편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되며, 이는 분열만을 보며 교회의 절망을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같은 시기에 사회 재건에 앞장섰던 생명의 역사도 함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현대 한국교회사를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거울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continue reading

99 에피소드

모든 에피소드

×
 
Loading …

플레이어 FM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플레이어 FM은 웹에서 고품질 팟캐스트를 검색하여 지금 바로 즐길 수 있도록 합니다. 최고의 팟캐스트 앱이며 Android, iPhone 및 웹에서도 작동합니다. 장치 간 구독 동기화를 위해 가입하세요.

 

빠른 참조 가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