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강.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로마서 1장 8-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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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강.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로마서 1장 8-17절)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장8-17절) 로마서 1장 8절을 보겠습니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롬 1:8)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지금 편지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로마 교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롬 1:9). 사도 바울은 자기가 로마 교인들을 위해서 항상 기도한다 말합니다. 그만큼 로마 교인들에 대한 사랑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롬 1:10). 사도 바울은 자신이 또한 로마 교인들에게 가서 가려고 노력한다 말씀합니다. 그러면 왜 로마에 가려고 하는 것입니까? 11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롬 1:11). 사도 바울이 그들을 보려고 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들에게 신령한 은혜를 은사를 주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롬 1:12). 그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어서 자기들도 그들에게서 안위함을 얻고자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 고난이 많은데 로마 교인들의 믿음과 자기의 믿음과 서로 위로하면서 힘을 얻고자 합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롬 1:13). 사도 바울은 바로 로마교인들도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하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길이 막혀 가지 못했습니다. 빚진자는 은혜받은 자로서의 의무를 가진자이다 14절을 보겠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 사도 바울은 헬라인 그 다음에 야만인과 지혜 있는 자와 어리석은 자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빚을 졌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자신이 빚을 졌다고 말합니까? 왜 이렇게 표현할까요? 자신이 이들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실제로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빚을 졌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예를 들어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고 세상에서도 예를 들면 부자가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장단점이 있는데 특히 단점이 뭐냐면 부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돈을 벌었으니까 내 거다. 이 돈은 다른 사람과 나랑 무슨 상관이 있냐 내 돈은 내 거다” 이 말이 인간적인 측면에선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자에게 돈을 준 것은 그 사람 혼자 먹고 쓰고 가족들만을 위하여 준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게 하시려고 특정한 사람에게 더 큰 은혜를 준 것입니다. 뛰어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생각합니다. 내가 똑똑하고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공부를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왜 왜 공부 잘하는 사람을 대우해 줍니까?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때문에 대우해 주는 게 아닙니다. 의사를 왜 대우해 줍니까? 의사가 되니 돈 잘 버니까 대우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연약한 환자들이 자신들에게 수술 좀 잘해달라고 하고 잘 치료해 달라고 하기 때문에 좋은 대우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목사를 대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직분 자체가 높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은 복음을 잘 아시니 복음을 성도들에게 잘 가르쳐 달라고 하기 때문에 대우를 하는 것입니다. 장로님, 안수집사님, 권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직분으로 대우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을 잘 섬기라고 그런 것입니다. 근데 우리가 타락하면 거꾸로 됩니다. 섬기는 마음은 없어지고 그 위치에서 대접받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사도로서 섬김받기보다는 오히려 로마교인들을 섬기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가서 가장 귀한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빚진자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으로는 그들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으니까, 이방인의 사도라는 직분을 받았으니까 복음을 증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죄가 없어지는가? 신자는 의인인가, 죄인인가?/ 신자는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다 이단인 구원파들은 예수 믿을 때 죄가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그들은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당신은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대답할 것입니다. 네.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이제 두 번째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은 당신은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여기에 두 가지로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의인입니다. 또는 죄인입니다의 경우를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의인입니다로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세 번째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의인이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예수 믿은 후에 죄를 짓습니까? 짓지 않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대답합니다. 죄를 짓습니다. 그러면 죄를 짓는 당신은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그러면 도 여러분은 죄인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때를 노려서 다시 여러분을 추궁합니다. 조금 전에는 분명히 의인이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왜 죄인이라고 합니까? 분명히 당신은 예수 믿으면 죄가 사함받고 의인이라고 하였는데, 왜 지금은 죄인이라고 말합니까? 그러면서 그들의 비수 같은 결정적인 말을 합니다. 당신은 예수님의 죄사함을 참으로 믿지 않기 때문에 아직도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죄사함의 복음을 정말로 믿었다면 확실히 의인입니다. 확실히 죄사함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당신은 죄사함의 복음을 모르고 구원의 확신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제 죄사함의 복음인 박옥수 목사의 설교를 들어 보세요라고 말합니다. 자 그러면 처음으로 돌아와서 그들이 다시 질문했다고 가정해 봅니다. 예수님을 믿은 당신은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그러면 죄인이라고 대답했을 때를 가정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때 그들은 다시 여러분을 추궁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았는데, 어떻게 죄인입니까? 죄사함을 확실히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까? 죄사함을 받았으면 죄가 없어졌으니까 의인이 아닙니까! 그러면 또 여러분은 할 말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질문을 제대로 답변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2. 남아 있는 죄 문제 해결을 위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신자들 안에도 죄가 남아있다. 이제 제가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죄가 없어지나요? 안 없어지나요? 죄가 없어집니까? 안 없어집니까? 정답은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도 죄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믿은 다음에도 죄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교리 중에 매우 중요한 교리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에도 선명히 나와 있습니다. 신자들 안에도 죄가 남아 있습니다. 죄의 존재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도말하시고, 없애시고, 지우신다, 저 멀리 치우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는 완전히 씻어지고, 지워지고, 도말되고, 없애셨습니다. 더 이상 죄가 남아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제가 앞에서는 죄가 남아있다고 해 놓고, 이제 여기서는 죄가 지워지고 도말되었다고 말합니다. 분명히 모순되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자에게는 죄가 남아있기도 하고, 죄가 없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죄가 없어진다. 지우겠다. 도말한다는 표현이 많습니다. 16-17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절) 이 16-17절 말씀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모든 성경 말씀이 다 중요하지만 우리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교회가 성립되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로마서 1장 16절 17절은 종교개혁 교회가 교회가 서고 넘어짐이 증명되는 그런 구절이라고 루터는 말하였습니다. 성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이 있다면 그것이 로마서일 것입니다. 또한 로마서에서 바로 서론이면서도 로마서의 요약 또는 성경 전체의 요약이 바로 오늘 본문 로마서 1장 16절 17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게 된 이후에 무엇보다 해결해야 될 아주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남아 있는 죄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로 인해서 수많은 이단과 여러 가지 교회들이 생겨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많은 교회들과 사람들이 이 남아있는 죄 문제, 예수 믿은 이후에 이 죄를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몰라서 미신에 빠지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사실 종교개혁 교회들이 생겨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 성도들 안에 남아 있는 죄 문제 때문입니다. 천주교회가 이 성도들 안에 남아있는 죄 문제를 미신적으로 해결하므로 이것을 개혁하고자 한 것이 바로 종교개혁입니다. 불신자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무엇으로 용서받습니까? 원죄와 그동안에 지었던 모든 자범죄를 다 용서받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뿐만 아니라 천주교회도 그렇게 주장합니다. 거의 많은 이단들도 그렇게 주장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불신자가 예수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난 후의 문제입니다. 예수 믿고 죄사함을 받아 신자가 됩니다. 그러나 또 신자들도 죄를 짓습니다. 이 죄를 해결하는 방법에서 종교개혁교회와 천주교와 이단들이 차이가 있습니다. 3. 천주교회는 성도들의 죄를 회개와 금식과 고행과 선행으로 값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후에 죄를 짓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럴 때 회개하면 용서받는다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면 다시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회개를 해야 용서받을 수 있나요? 단순히 죄를 회개합니다라고 말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면 그냥 단순히 고백하면서 저는 이런 죄를 졌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면 용서받습니까? 좀 부족한 것 같습니까? 단순히 고백 말고 또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요? 누구는 말할 것입니다. 진심으로, 진지하게,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한다. 그러면 어느 정도 진심으로, 진지하게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까?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진심으로, 진지하게 통회하는 마음을 위해서 3일 금식, 7일 금식, 21일 금식, 40일 금식을 합니다. 40일 금식을 하면, 정말 통회하는 마음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까? 주일에 와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당연히 회개해야 합니다. 천주교회가 이와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이 이 땅에서 죄를 지었을 때,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라고 합니다. 그 다음주 또 고해성사를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면 신부는 말합니다. 3일 금식기도 하세요. 그 다음주 또 다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신부는 말합니다. 7일, 21일, 40일 금식기도 하세요. 그 다음주 또 죄를 짓습니다. 이제 신부는 말합니다. 가만히 있으니 죄를 짓기만 합니다. 이제 선행을 통해서 죄를 씻으세요. 그러다가 이제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죄를 지었는데, 죄 값을 다 못 치를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신부는 뭐라고 말합니까? 남은 죄의 값은 연옥이라는 곳에 가서 갚으세요. 천국과 지옥의 중간단계인 연옥에 가서 한 천년 동안 열심히 죄값을 치르면 됩니다. 그리고 그 신자가 죽었습니다. 이제 신부는 그 자식들에게 말합니다. “부모님이 현재 연옥에 있습니다. 그런데 연옥에서 혼자 죄값을 치루면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부모님이 연옥에서 빨리 나오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식들이 부모를 대신하여 죄값을 치루는 공로를 행하면 됩니다.” 그러면 또 다시 자식들이 부모를 위해서 죄값을 치루기 위해서 기도하고 선행을 합니다. 천주교에서 열심히 선행을 하는 목적은 순수한 동기가 아니라 자기들의 죄에 대한 댓가를 치르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순수하지 않습니다. 이제 천주교회는 그 선행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최고의 선행은 바로 교회에 헌금을 내는 것입니다. 헌금이 선행이라는 것입니다. 이 헌금은 죄 값을 사해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헌금이 죄사함을 한다는 증거로 죄사함의 증서를 써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연옥에 계신 부모님의 죄값을 해결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중세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이 면죄 증서, 곧 면죄부를 샀습니다. 당시에 마틴 루터도 신학교수였는데, 이 증서를 자기와 부모님을 위하여 샀습니다. 루터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죄를 짓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회개하고 기도하고 선행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에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는 로마에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그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사함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루터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만 보면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다가 루터는 오늘 본문 17절을 보고 큰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이 바로 종교개혁을 여는 구절이 되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4. 복음은 믿는 자에게 세 가지의 구원을 준다; 죄의 존재, 죄의 형벌, 죄의 세력으로부터 4.1.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과거형) 사도 바울은 16절에서 말합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통하여 세 가지의 구원을 주십니다. 첫 번째는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종류에 대해서 정리하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첫 번째, 죄의 존재입니다. 죄의 존재는 예수 믿은 후에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은 후에도 여전히 죄의 존재는 남아있습니다. 죄는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다. 예수 믿은 후에도 여전히 우리는 탐심을 가지고 있고, 미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간음도 합니다. 이것은 예수 믿은 후에도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의 형벌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의 존재 자체를 짊어지시고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죄의 존재가 남아있지만 그 대신 그 형벌을 예수님이 피로 치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의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신학적으로 이중 전가입니다. 우리의 죄의 형벌을 어린양처럼 예수님이 전가 받으셨습니다. 이것을 죄의 전가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주십니다. 이것을 의의 전가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의를 우리는 칭의라 부르기도 합니다. 칭의라는 말뜻은 의롭다 칭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실제로 본질은 의롭지 않으나, 의롭다고 칭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값을 다 치루셨기 때문에, 우리가 여전히 악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죄사함의 복음을 믿는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신ㄷ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칭의입니다. 죄가 우리 안에 남아 있지만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더 이상 지옥의 형벌을 받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죄가 없어졌다. 지워졌다. 도말하였다는 표현은 바로 죄의 댓가, 죄의 형벌을 다 치루었다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그리스도인에게는 죄의 형벌이 없습니다. 더 이상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것을 구원받았다. 과거형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4.2. 죄의 존재로부터의 구원(미래형) 두 번째는 죄의 존재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성도들도 이 땅을 떠날 때까지 죄가 그 안에 남아 있습니다. 성도들 안에 있는 죄의 존재 자체는 언제 없어질까요? 바로 우리가 천국에 가는 순간입니다. 이 땅에서는 죄의 존재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죄는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불신자 뿐만 아니라 성도 안에도 이 죄가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죄가 없어지는 단계를 신학적으로 영화라 합니다. 이 영화의 상태는 우리가 이 땅을 떠날 때에 일어납니다. 이 죄의 존재는 우리가 이 땅을 떠나서 천국에 갈 때 이 죄가 완전히 없어집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영화라고 합니다. 죄가 없어진다고 주장하는 성결교단과 오순절 교단 죄의 존재는 남아 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이단들의 특징은 죄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결교회가 있습니다. 왜 교파 이름이 성결교회입니까? 한마디로 이 땅에서 죄가 없어지는 단계인 성결을 추구하는 교파라는 의미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성령을 받으면 언젠가는 죄가 없어지는 단계가 온다고 믿는 교파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면 언제 죄가 없어지는가? 그래서 찰스 파암이라는 성결교 목사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성령세례를 받으면 죄가 없어지는 단계가 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세례는 언제 받는 것이냐? 바로 방언을 받을 때에 성령 세례를 받는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회라는 교단, 오순절 교단을 만든 것입니다. 방언을 받으면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고, 이때 죄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자, 정리한다면, 성결교단은 이 땅에서 죄가 없어지는 단계가 언젠가는 온다는 것이고, 오순절 교단은 방언을 받을 때에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며 죄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의 주장이 맞는 것입니까? 이들 말대로 성령 세례를 받고, 방언 받은 사람 중에서 죄가 없어진 사람이 있습니까? 방언을 받은 사람이 죄가 없어집니까? 안 없어집니다. 여러분 방언 받은 사람도 죄를 집니다. 그 사람들은 방언을 받으면 죄가 없어진다고 맨 처음에는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방언을 받고 지내다 보니까 여전히 자기들도 죄를 짓습니다. 이게 뭡니까? 그들은 당황합니다. 방언을 받아도 성령세례를 받아도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들의 교리가 처음과 달리 상당히 바뀌었고, 지금도 조금씩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에 죄의 존재가 없어지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을 그래서 미래형의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죄가 없어진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도덕적인 폐해 그런데 아직도 그것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교단인 순복음이나 은사주의 교회들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성결교회의 이재록입니다. 자기가 죄가 없어졌다고 주장하는 목사들은 완전히 이단입니다. 그리고 교회나 사회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런 자들은 자기가 죄가 없어졌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모든 행위는 죄가 없는 행위라고 합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을 강간하든, 말로 저주하든, 도둑질을 하든 모두 죄가 없는 행위라고 합니다. 그들은 자기 안에 성령께서 모든 죄를 없애셨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의 행위는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4.3. 죄의 세력과 오염으로부터의 구원(현재형) 세 번째는 죄의 세력, 오염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것을 하나의 비유로 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죄는 마치 뱀과 같습니다. 뱀이 어느날 나무판 위를 기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뱀의 머리를 큰 못과 망치로 나무판에 쾅 박았습니다. 자, 그러면 뱀은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뱀은 죽었다고도 살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죽을 것이니까 죽었다고 할 수 있고, 아직은 꿈틀거리니까? 아직은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죄의 세력, 죄의 힘이 약해져 갑니다. 바로 우리 안에 죄가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불신자였을 때에 그 죄의 힘이 완전히 우리를 압도합니다. 우리 안의 죄는 예수 믿을 때에 처음으로 뱀이 나무에 못박히듯이 머리가 박살났습니다. 그래서 죄가 죽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리 마음에 죄가 살아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가 있을 때에 우리는 죄를 덜 짓습니다. 그러나 시험에 들었을 때 우리는 죄에 빠지고 미친 짓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로 점점 더 그 죄의 힘이 약해집니다. 나무에 못박힌 뱀처럼 점점 죄에 힘이 빠집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성화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죄의 힘을 죽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새 마음, 새 의지를 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새 마음과 선한 새 의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죄의 의지는 약해지고, 점점 선한 의지가 힘을 얻습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이 죄의 세력과 오염으로부터의 구원을 현재형의 구원이라고 말할 수있을 것입니다. 세 가지 구원 정리 정리한다면 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을 줍니다. 이 구원은 세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죄의 형벌을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다 짊어지시고, 우리에게 의를 덮 입혀 주신 것입니다. 비록 우리 안에 죄가 남아 있지만, 예수님은 그의 의로 우리를 덮어주시고, 의롭다고 칭하십니다. 두 번째는 죄의 존재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죄의 존재는 이 땅을 우리가 떠날 때에 없어집니다. 우리는 죄의 존재로부터의 구원은 이 땅을 떠날때에 일어납니다. 세 번째는 죄의 세력, 죄의 오염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뱀 같은 죄도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의 피와 성령으로 십자가에 못박힙니다. 그래서 죄가 죽어갑니다. 또한 반면에 우리 마음에 새 마음이 생겨서 서서히 죄를 이기기 시작합니다. 이 세가지의 구원을 간단히 말한다면, 우리는 죄의 형벌에서 구원받았고, 우리는 죄의 세력과 오염에서 구원받고 있는 중이며, 우리는 죄의 존재로부터 구원받을 것이다. 5. 구약에서 성도들이 죄를 용서받은 방법; 속죄제사와 제사장의 죄사함의 선포 우리는 날마다 매 주마다 죄를 짓습니다. 예배 끝나고 또 죄를 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용서를 받습니까? 죄를 지었으니까 하나님께 진심으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죄를 고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회개했다는 회개의 행위라는 공로로 용서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으로 용서받을 수 있나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바로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습니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먼저 구약 백성들의 예를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구약 백성들은 무엇으로 용서받았을까요? 그들은 매 주마다 속죄제사를 드림으로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안식일마다 속죄제사를 드립니다. 제사 후에 제사장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죄는 이 짐승에게 전가되었고 그 죄에 대한 댓가는 다 치루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속죄제사로 인하여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구약백성들은 매주의 안식일마다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예배는 기본적으로 보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죄사함의 선포가 예배의 핵심이었습니다. 속죄제사와 제사장의 죄사함의 선포 이 두 가지가 구약예배의 핵심입니다. 제사장은 말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일주일 동안 지은 죄가 이 염소와 황소와 이 어린 양이 여러분의 죄를 다 담당했습니다. 여러분의 죄의 형벌이 넘어갔습니다. 여러분은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매주 마다 제사장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6. 신약의 성도들은 그들의 자범죄를 목사가 선포하는 죄사함의 복음을 믿음으로 용서받는다 불신자는 원죄와 자범죄를 예수를 믿음으로 용서받는다 쉽게 처음부터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자 여기에 불신자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불신자는 어떻게 그의 원죄와 자범죄가 용서받습니까? 어떻게 하면 죄를 용서받고 천국을 갈 수 있습니까? 그에게 회개하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동안 지은 모든 죄를 다 빠짐없이 회개해야 용서받고 천국 갈 수 있다고 말합니까? 아닙니다. 단순히 예수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천국 간다고 말할 것입니다. 회개란 무엇인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일일이 나열하는 것을 회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거기에 통회하는 마음과 눈물까지 있으면 참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회개의 본질이 아닙니다. 회개는 근본적으로 마음을 돌리는 것입니다. 한자로도 돌이킬 회입니다. 죄악된 길에서 이제 하나님을 향한 방향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특히 마음을 돌리는 것입니다. 죄를 일일이 열거하면서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나의 죄인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죄의 뿌리인 존재 자체가 죄인인 나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로 충분합니다. 어떠한 사람도 자기가 지은 죄를 다 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냥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라고 해도 충분합니다. 자 이제 다시 말한다면, 불신자는 어떻게 하면 구원받나요? 모든 죄를 고백해야 용서를 받습니까? 아닙니다. 불신자가 자기의 모든 죄를 고백하는 게 아니라 단지 예수님의 복음을 믿음으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단순히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고, 영생을 받고 복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하였다 15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 1:15)” 사도 바울이 로마에 어찌하든지 가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복음 전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반대로 로마 교인들은 무엇을 원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목사들은 무엇을 교인들에게 전해야 합니까? 바로 복음입니다. 교인들은 무엇을 가장 원해야 합니까? 바로 복음입니다. 그런데 희안합니다. 원래 복음은 불신자에게 전해야 합니까? 아니면 신자에게 합니까? 보통 복음을 전한다 하면 불신자에게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을 로마교인들에게 전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 16-17절에서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15절에서 말합니다.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보통 복음은 불신자에게 필요합니까? 아니면 신자에게 필요합니까? 보통 사람들은 불신자에게 복음을 증거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누구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합니까? 바울은 로마 교인들한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고 얘기합니다. 바울은 불신자한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희한하게도 로마 교인들에게, 벌써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한테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그러고 있습니다. 이거 너무 신기하지 않습니까? 복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 또 복음을 들어야 됩니까?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이 말씀은 신자들에게도 복음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전하기를 원했던 복음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복음을 생각할 때,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복음에 대한 커다란 오해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불신자에게만 복음이 필요하고, 신자들에게는 삶의 도리, 교훈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죄를 회개를 통하여 용서받는다고 주장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우리 신자들의 남아있는 죄는 어떻게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까? 17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우리의 남아 있는 죄는 원죄와 같이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받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매주 짐승의 피로 제사 드린 후에 죄사함의 선포가 있었다면,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이 속죄제사가 충분한 능력과 효력이 있기 때문에 매주 예수님의 죽으심이 필요 없습니다. 단지 목사들의 죄사함의 복음선포만이 있을 뿐인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는 구약시대보다 훨씬 더 큰 죄사함의 풍성함이 있습니다. 짐승의 피보다 예수님의 피는 훨씬 그 효과와 능력이 넘쳐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복음은 비록 연약한 목사가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말은 헛되고 행함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말만 하지 말고, 행동을 하자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신학교수였던 마틴 루터는 죄사함을 받으려고 로마 그 성당에 가서 로마에 가서 무릎으로 그 몇백 개의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무릎으로 올라가면서 주여, 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며, 올라갑니다. 끝까지 루터가 올라갑니다. 그러나 루터에게는 죄사함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부모님과 자기의 용서받은 증명서인 면죄부를 샀는데도 용서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루터는 성경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만 나오면 공포를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하며 공포에 떨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본문 17절을 읽고 죄사함에 대한 확신을 느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크게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 의는 엄위하신 하나님의 의로서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에서 의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긍휼을 의미합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죄인인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의를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사랑의 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를 대속할 속죄제물로 이 땅에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대속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의 죄를 덮어주시는 의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죄를 덮어주시는 의입니다. 정리한다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의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에 근거하여 그의 아들을 주신 사랑의 의입니다. 또한 이 하나님의 의는 죄인인 우리의 죄를 덮어주시는 의입니다. 자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의를 우리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17절은 말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복음을 선포할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목사가 복음을 선포할 때에 죄인인 여러분이 지은 죄를 하나님의 의로 덮어준다는 것입니다. 복음 설교를 들을 때에 하나님 의가 여러분을 덮어준다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었다라고 말하지 않았고, 현재, 지금 복음에 하나님의 나타난다, 나타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근데 여기서 놀라운 표현이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현재에 믿고 있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복이 지금 나타나고 있는 중입니다. 복과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구원을 주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믿은 새 신자도 구원을 받습니다. 오래된 신자도 하나님께서 구원을 더욱더 풍성히 베풀어주십니다. 어린아이 젊은이 노인 남자 여자 현재 낙심하고 있는 자 시험에 들었던 자 병든 자 가난한 자 어떠한 누구도 이 하나님의 복음이 선포될 때 거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무의식적인 죄뿐만 아니라 고의적인 죄도 용서받는다 자 여기서 신자들이 짓는 죄 중에 몰라서 짓는 죄도 있지만, 고의적으로 짓는 죄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고의적인 죄들은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히브리서 10장 26-27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6-27). 여기서 짐짓은 고의로라는 의미입니다. 문자그대로 해석하면, 고의로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심판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고의적인 죄들은 용서받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 레위기 6장은 신자들의 고의적인 죄를 위한 속죄제사를 말합니다. 모르고 한 행위에 대한 속죄제물은 레위기 4장에서 말합니다. 구약에서도 고의적인 죄에 대한 속죄제물이 있었는데, 하물며 그리스도의 보혈이 짐승의 피보다 못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고의적인 죄에 대해서도 충분히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다윗은 율법에 통달하였습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간음죄와 살인죄를 처벌하는 재판장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기가 범한 간음죄와 살인죄를 모르고 지었을까요? 야곱의 아들들이 자기의 동생인 요셉을 죽이려고 하였는데, 모르고 한 것일까요? 고린도 교인들이 분쟁과 미음과 음행을 죄라고 생각하지 못하였겠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며 맹세한 것은 모르고 한 것입니까? 다 고의적인 죄입니다.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이 악한 고의적인 죄조차도 그의 아들의 피로 용서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놀랍고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목사의 복음선포가 천국열쇠이다. 신자들의 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용서받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어라고 회개하고 눈물과 땀을 흘리며 노력해서 겨우 용서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중풍병자에게 먼저 일어나 걸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에게 먼저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마디 말씀으로 용서를 해 주셨습니다. 사도들에게도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23). 사실 사도가 무슨 존재인데 사람들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 말씀은 참으로 희안한 말씀입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면 용서를 받는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입니까? 어떻게 사람이 죄를 용서합니까? 그러나 분명히 예수님은 이 말씀을 사도들에게 하셨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23). 죄사함의 권세를 사도에게 주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들 개인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직분에게 준 것입니다. 가르치는 직분과 죄를 사하는 능력을 분리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 제자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양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축복의 창시자들이 아니라, 축복의 증인이며 선포자들일 뿐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도들에게 죄용서의 복음을 위탁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이 목사들에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천주교는 자기들의 일꾼을 고해성사를 받는 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복음을 맡은 자가 복음을 선포할 때 믿는 자가 죄용서를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또 마태복음 16장 19절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9). 여기서는 베드로에게 직접적으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도 개인으로서의 베드로가 아니라 이 천국열쇠를 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바로 사도직분을 가진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준다는 것입니다. 즉 개인이 아니라 직분에게 천국열쇠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말한다면, 나라의 대통령은 국방이나 나라의 재정이나 대다수에 권한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개인이 아니라 그 대통령이라는 직분에 그 권한을 준 것입니다. 대통령도 그 직분을 그만두면 더 이상 그 권한이 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열쇠도 개인으로서의 베드로에게 준 것이 아니라, 사도직분을 가진 베드로에게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주일마다 두 가지를 선포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게 하려고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죄사함의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로 교인들을 덮어주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꼭 이 두 가지를 명심해야 됩니다. 교인들은 목사를 통하여 이 두 가지, 모든 것을 가르침을 받기를 원해야 되고, 죄사함의 복음 선포를 들으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외의 여러 성경에 관한 가르침은 주일 이외에 다른 시간들에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과 대소요리문답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근데 요즘 교인들이 모를 뿐입니다.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심히 안타깝습니다. 어떻게 신자들의 남아있는 죄가 용서받습니까? 신약시대에 교인들은 어떻게 지은 죄에 대해서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원래 개혁교회는 주일예배를 시작할 때 목사의 사죄의 선포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목사 000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죄가 사함받았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상당히 놀랍죠. 어떻게 목사 개인이 신성모독적으로 죄를 용서할 수 있을까? 이것은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 장로 교단의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0장 1-2조는 이와 같은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 예수는 교회의 왕과 머리로서, 국가의 위정자와 구별되는, 교회 직원의 손에 있는 정치를 교회에 정하셨다. 이들 직원들에게 하늘 왕국의 열쇠가 맡겨져 있으니, 이들은 이 열쇠의 효력으로, 죄를 사하고 보유하는 권세와, 말씀과 권징에 의하여 회개치 않는 자에게 왕국을 닫는 권세와, 그리고 복음의 사역과 상황에 따른 권징의 사면에 의하여 회개하는 죄인에게 왕국을 여는 권세가 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53-154문답에서 같은 것을 말합니다. 153문답. 범법으로 인하여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피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범법으로 인하여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피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중보의 혜택을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외적 방편을 부지런히 사용하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154문답. 그리스도께서 자기 중보의 혜택을 그 몸된 교회에 전달하시는 외적 방편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자기 중보의 혜택을 그 몸된 교회에 전달하시는 외적 또는 통상한 방편은 그의 모든 규례인데, 특별히 말씀과 성례 및 기도이다. 이 모든 것은 택함을 입은 자들의 구원에 유효하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천국 열쇠는 복음을 전파하는 직분인 목사가 가지는 열쇠입니다. 이 열쇠는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복음입니다. 즉 신자들이 일주일 동안 범죄한 죄들은 바로 목사가 천국 열쇠인 복음선포를 통하여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 개인이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을 주는 것은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주일 오전 예배 같은 경우는 설교를 죄사함의 복음 선포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다 짊어지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형벌을 다 짊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효력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의 형벌을 치루기에 충분합니다. 어떠한 죄나 그 죄의 포악성에 대한 형벌도 예수님의 피 한방울의 가치에 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의 피이기 때문에 그 가치는 무한합니다. 우리의 형벌을 치루기 위해 고행이나 인간의 공로나 연옥의 고통이나, 성자들이나, 마리아의 도움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또 다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린 양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에 계십니다. 거기서 우리를 위해서 대제사장의 역할을 지금도 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시면서 선지자이면서 왕으로서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거기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시면서 성령을 부어주시면서 여러분의 죄를 씻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도들이 일주일 동안 지은 죄를 씻습니까? 바로 특히 주일 오전 예배마다 목사가 선포하는 죄사함의 복음으로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복음으로 여러분의 죄를 지금도 씻어주시고 원죄만이 아니라 일주일 동안 지은 자범죄도 넉넉히 풍성히 용서해 주십니다. 구약시대에는 매주 안식일마다 속죄제사를 드린 후에 제사장들이 죄사함의 선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매주일 마다 속죄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과거에는 짐승의 피의 효력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매주 속죄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속죄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속죄제사의 효력은 무한하고 충분하기 때문에 또다시 속죄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매주 목사는 예수님의 피의 속죄효력을 계속적으로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중요한 교리이며, 우리 장로교의 신조에서 가르치는 교리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신학교에서 이것이 제대로 가르치지가 않고 있다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다른 일반 목사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교에서 이렇게 중요한 교리가 가르쳐지지 않기 때문에 목사들이 설교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설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주 죄를 짓습니다. 그것을 지적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여러분의 죄를 비판하는 설교가 어렵겠습니까? 아니면 쉽겠습니까? 비판하는 설교는 사실 연구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여러분의 자체를 그냥 비판하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그냥 성경을 인용하면서 비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는데 여러분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사랑한다고 대답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이렇게 또 말하면 됩니다. 진짜 사랑합니까? 그런데 사랑하는 게 그 정도예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정말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합니까? 사랑하는 게 그 정도입니까?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네요. 예수를 제대로 믿고 있는 것입니까? 십계명 자체만 세게 얘기해도 아주 부담스럽습니다. 여러분의 일주일 동안 지은 죄는 어떻게 용서받습니까? 매주 선포되는 목사의 죄사함의 복음선포를 듣고 믿음으로 용서받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매주 죄사함의 복음을 선포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단들도 정통교회와 똑같은 성경, 찬송가, 성가대, 십일조, 구역조직, 봉사, 선행, 기도 거의 모든 것이 비슷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목사의 설교만 다를 뿐입니다. 실제로 설교도 대다수 비슷합니다. 여러분 이단들의 설교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다 틀린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서로 사랑하자, 하나님께 헌신하자, 선교하자, 기도하자, 인내하자의 설교가 정통교회와 차이가 있겠습니까? 정통교회보다 더 은혜롭게 힘차게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다 좋아 보여도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죄사함의 복음 선포의 차이입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에게 죄사함의 복음을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의 모든 죄의 댓가를 십자가에서 다 치루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고 승천하셔서 지금은 여러분의 죄를 그의 피로 용서하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과거의 죄를 모든 죄를 다 씻으시고 지금도 여러분의 죄를 다 씻어주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죄사함의 복음 선포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러한 것입니다. 이 구절에 근거하여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선포 없이 죄에 대하여 지적만 하는 설교는 문제가 있다 불신자였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은 후에 주일이 되었습니다. 은혜에 감사해서 헌금도 하고 거룩한 삶을 결단합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에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는 그동안 계속 은혜의 생활을 했을까요? 구원받았으니까 거룩하고 깨끗한 생활만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교회에 왔습니다. 일주일 동안 또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죄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요? 보통 많은 사람들은 처음 불신자가 예수 믿을 때에는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지만, 그 후에 신자가 되었을 때에는 회개를 통하여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바로 천주교와 이단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많은 개신교 목사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설교합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값진 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뻔뻔하게 죄를 지을 수가 있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했는데, 지키지 않습니까? 어떻게 부모를 공경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마음에 간음을 합니까? 어떻게 마음에 탐심을 품어서 우상숭배를 합니까? 어떻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주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지 않습니까? 교인이 되고 중직자가 되어서 그렇게 죄를 짓는 것이 과연 주님을 제대로 믿는 것입니까? 이 설교가 틀릴까요? 맞을까요? 틀린 곳이 있나요? 만약 제가 이렇게 주일 오전마다 설교를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상당히 개혁적이고, 신선해 보입니다. 또한 목사의 권위도 엄청 높아집니다. 왜냐하면 다 비판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 비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부모를 공경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예수를 믿는 사람이 거짓말을 합니까? 어떻게 예수를 믿는 사람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미워합니까? 어떻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마음에 간음죄를 짓고 욕심을 부립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이 어떻게 탐심을 하고 욕심을 부립니까? 어떻게 예수를 믿는 사람이 십일조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할 수가 있습니까? 다 맞는 얘기입니다. 다 맞는 말씀이기 때문에 항변할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설교하는 의도는 설교를 들은 후에 회개하라는 의도일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 후에 회개의 시간을 가지는 교회도 있습니다. 회개를 통하여 죄용서를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설교자가 설교를 회개의 도구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설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설교를 회개의 도구로만, 성화의 도구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완전한 설교입니다. 주일 오전 설교에는 이렇게만 설교해서는 무엇인가가 부족합니다. 온전한 복음이 다 선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과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15-16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5). 만약 매주 죄사함의 복음 선포가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 신약 백성들은 구약 백성보다 더 안 좋은 상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 사람들은 매주 죄를 짓지만, 안식일에 와서 속죄제사를 드리며 죄사함 받고 마음에 평안을 얻기 때문입니다. 또 죄를 지으면 안식일을 기다리고 그 안식일에 죄사함 받고 평안을 얻습니다. 신약 백성들은 처음 믿을 때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평안을 얻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죄를 지으면, 낙심합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주일을 기다립니다. 그러면 목사는 왜 예수 믿었는데, 죄를 끊지 못하고 죄를 지었느냐고 비판합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피를 무시하고, 성령을 무시하고 죄를 짓느냐고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그래서 죄를 인정하고 회개를 합니다. 그런데 죄사함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회개를 통해서 죄사함을 구하는데, 과연 자기가 진지하게 회개하여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지 궁금하고 의심스럽습니다. 언제까지, 어느 정도 회개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구약 백성은 깔끔하게 매 안식일마다 속죄제사를 드림으로 죄사함 받고 평안을 얻었는데, 아직도 신약 백성이라는 자들이 처음에는 죄사함의 평안을 얻지만 그 다음에는 불안한 것입니다. 회개하고 금식하고, 선행하고, 봉사하고 끊임없이 진지하게 기도합니다. 언제까지, 어느 정도로 회개를 해야 합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복음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5.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제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세상은 철학을 좋아합니다. 세상에서 철학이 멸시받은 시대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철학적인 얘기를 좋아합니다. 설교단에서도 철학적인 얘기 또한 요즘에는 경영학과 심리학과 그 외에 여러 가지 재밌는 이야기가 인기가 있습니다. 이제는 더 나아가서 요즘은 개그맨처럼 사람들을 재밌게 합니다. 설교자들이 복음을 섞어서 얘기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복음은 철학이 아닙니다. 복음은 경영학도 아니고 심리학도 아닙니다. 복음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복음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도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왜 부끄러워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른들은 설교를 단순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아이들은 설교를 잔소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설교 좀 그만해!라고 말합니다. 설교가 율법적이며, 지루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선포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 능력은 무엇입니까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이야기들이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람을 구원할 능력은 복음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영혼은 수백만의 가르침과 수많은 이야기를 통해서 감동 받고 변화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 복음만이 그의 영혼에 생명을 주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만이 사람에게 생명을 줍니다.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6-17절에서 복음의 핵심 내용을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장16-17절). 사도 바울은 참 희한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왜 이런 표현을 씁니까? 이 당시에는 로마 제국이 통치하는 시대입니다. 로마 제국은 힘의 제국입니다. 오늘날로 하면 미국과 같은 나라입니다. 로마는 당시 세계 제국의 심장과 같은 곳입니다. 로마 교인들은 오늘날 미국의 뉴욕 시민과 같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가난한 나라, 연약한 나라 출신의 사람, 유대 사람이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 제국이 아무리 강대한 나라라 하더라도 이 복음은 더 대단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복음의 능력 이렇게 표현할 때 능력 이것을 단순히 헬라에서는 힘이라는 단어 에네르기아를 쓰지 않고 뒤나미스라고 씁니다. 뒤나미스 영어로는 다이내믹 이런 뜻 아닙니까? 다이나믹 역동적인 복음 선포가 잘 될 때 복음선포를 들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듣는 사람의 속에서 구원을 이루는 창조적인 능력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역동적이고로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다. 죽은 문자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착각을 합니다. 설교를 단지 이야기이며, 단지 그냥 그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능력입니다. 역동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네 가지 밭이 있습니다. 3가지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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